이상화가 백조에서 파스큘라로, 그리고 카프로 자리를 옮겨가는 이러한 과정은 서정양식 선택의 조건으로서 해명할 수 있다. 김윤식이 “백조의 데카당스는 일종의 예술적 저항이며 따라서 가장 데카당한 깊이에까지 도달한 시인일수록 가장 깊은 계급 혹은 저항이데올로기로 이행할 수 있다”고 도
Ⅰ. 서론
1. 이상화시인의 생애
이상화의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白亞)이다. 1901년 5월 9일 대구 출생이며, 7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백부의 훈도를 받으면서 가정 사숙(私塾)에서 수학했다. 18세때 경성중앙학교 3년을 마쳤고,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친구 백기만(白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분단시대의 문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과거 우리의 문학사는 분단 속에서 왜곡된 문학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의 내용과 상관없이 북한의 문학을 거부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분단 후 북으로 건너간 문학인들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인의 것이다. 초기 시에 해당되는 시편들로는 <말세의 희탄>,<이중의 사망>, <그날이 그립다>, <쓸어져 가는 미술관>, <단조>, <가을의 풍경> <환몽병>, <나의 침실로> 등이 있다. 이 중 <나의 침실로>는 이상화의 낭만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의 초기시의 특질을 가장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감상시에서 현실시에의 변화를 나타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발전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상화의 현실파악의 방법이 「그날이 그립다」 「몽환병」「말세의 희탄」 등이 보여준 눈물·원한·밤·죽음과 같은 충동적이고 개인적인 절규가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빈촌의 밤」「
이상화의 전기적 고찰
尙火 李相和는 1901년 음력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시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사별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명망 있는 가문의 좋은 환경 덕에 그들 4형제는 이후 모두 걸출한 인물들로 자라나서 형 相定은 항일 투쟁의 장군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이광수(李光洙) · 계광순(桂光淳) 등 납북 인사 33인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사당하였다. 이 장에서는 월북작가 박태원과 정지용문학의 존재방식(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북한문학사에서의 위상평가에 대해서도 비교분석해 보기로 하자.
시사의 벽두를 장식한 『시문학』을 주재한 일과, 또 세칭 ‘기교주의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임화와의 논쟁으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이다. 김영랑 정지용 등 이른바 시문학파의 순수시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시문학 이론가로서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실제 시작품에 있어서는 그에 이르
작가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이러한 산물로 이광수의 『이순신』, 김동인의 『젊은 그들』·『운현궁의 봄』·『제성대』·『견훤』, 박종화의 『금삼의 피』·『대춘부』, 현진건의 『무영탑』, 홍명희의 『임꺽정』 등의 작품이 탄생
시켰다.
시인들의 작품 활동은 활발했지만, 3.1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암울한 정서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동시에 우울한 시대 의식과 비애, 현실로부터의 탈출과 도피가 시의 중심 내용이 되었다. 이러한 감상적이며 영탄적 어조를 띤 낭만주의 시가 대두되었다.
낭만주의의 작품들은 전대에 비하